anjiroom DS와 MJ의 블로그입니다. 주인장이 두명이므로 좀 헷갈릴 지도 모르겠으나 그냥 헷갈리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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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더운 지방에서도 녹지 않는 눈으로 유명한 시에라 네바다 산맥(세계지리에서 완전 들어본 이름인데 이곳에 있을 줄이야, 여름에도 스키를 탈 수 있다고 한다.) 기슭에 있는 평야 '베가'에 형성된 그라나다는 이슬람 건축 최고의 걸작이라 여겨지는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도시. '알함브라의 추억' 기타 음악 때문에 로망이 생겨 있으므로 스페인에 왔다면 보아야 할 곳이긴 한데, 이베리에 반도의 아주 남단에 있기 때문에 짧은 일정에 방문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라나다가 가장 번창했던 때는 이슬람 왕조인 나사리 왕조가 지배했던 1238년부터 약 250년동안으로 무어왕국의 수도였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이름을 떨쳤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장님이라는 말까지 있다.

그라나다에 대해 이해하려면 일단 스페인 역사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페인의 어원이 된 ‘스파니아(Spania)'라는 말은 지중해를 가로질러 있는 ‘외지고 막다른 곳’, 또는 ‘해가 지는 곳’라는 뜻으로 페니키아인들이 처음 사용한 명칭이며, 이후 로마인들은 ‘이스파니아(Hispania)’로 불렀다. 지중해에서 로마와 카르타고의 헤게모니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이베리아 반도는 두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264-241 B.C.)에서 시칠리아,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로마에 빼앗긴 카르타고가 세력 만회를 위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하자 로마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에 상륙, 2차 포에니 전쟁(218-202 B.C.)의 결과 한니발의 카르타고가 반도에서 축출되고 스키피온이 이끄는 로마가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베리아 반도가 로마화 되면서, 라틴어가 전파되었고, 도로, 다리, 항만, 극장 등의 사회문화적 기반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 후 로마의 쇠락과 함께 서고트족이 똘레도와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반도의 중심부를 지배했으나 이슬람세력에게 밀려나게 되고 그 후 800년 동안 이슬람이 반도를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의 그들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쪽의 이슬람을 말한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6~7년)로 밀고 올라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후 지금의 프랑스까지 전진하려는 찰나 피레네 산맥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슬람인들은 평지에서의 싸움에서는 능했으나 산악지형 전투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춥고 습한 산맥 북쪽의 땅은 이슬람인들에게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피레네산맥을 넘으려는 무리를 하지 않았다. 피레네산맥만 없었다면 온 유럽땅이 이슬람화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 있다.


점차 이슬람 세력이 확장하는 가운데, 반도 북부에는 아스투리아스, 카스티야-레온(지금의 마드리드 정도), 아라곤(지금의 까딸루냐 즉 바르셀로나정도), 나바라, 그리고 서부에 포르투갈 같은 기독교 왕국들이 등장했고, 기독교 세력의 국토수복(Reconquista) 기운이 팽배해갔다. 국토수복과 국교 통일을 완성한 것은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두 가톨릭 군주에 의해서였다. 이슬람 왕국들이 하나 둘 무너져 가고 있었을 무렵, 그라나다의 왕은 11~13세기에 지어진 알카사바라 불리는 요새가 있는 옆으로 거처를 잡고 왕궁을 세운다. 왕은 그라나다를 지키기 위해 같은 이슬람 왕국이 기독교와의 대항을 이유로 요청한 구원을 거절하고 기독교 세력에게 기대는데, 이를 못마땅히 여긴 귀족들은 왕에게 항의를 하게 된다. 왕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성 내에 귀족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하나 둘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알함브라는 다른 도시의 성과는 달리 성벽 안에 귀족들의 집과 군사시설, 평민들이 머무는 곳, 농사를 위한 땅 까지 모든 것이 모여있다. 

이 때 왕족이 머물던 궁전이 우리가 관광을 하려면 시간을 정해서 예약을 하고 표를 사야 하는 그 유명한 '나사리궁'이고, 그들의 여름 별장이 '헤네랄리페' 이다. 이슬람인들에게 물은 부의 상징이었으므로, 나사리궁과 헤네랄리페의 정원에는 많은 연못과 분수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아름다운 식물들이 화려함과 푸르름을 더한다. 그 드넓은 부지를 온통 멋들어진 정원으로 풍요롭게 꾸며 놓았다. 유럽인들보다 먼저 의자문화를 발달시켰던 이슬람인들은 앉는 것 보다 더 편한 눕는 것으로 관심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래서 앉아서 바라보는 벽면에 신경을 많이 썼던 유럽 건축물과 달리 이슬람 건축물은 천장에 온갖 정성을 쏟아붇는다. 알함브라도 이에 거스름 없이 천장에 섬세한 문향과 조각을 꽉꽉 채워 넣어놓았다. 겉만 보고 '뭐.. 그냥 네모네모잖아' 하고 있다가 안에 들어가면 턱을 치켜올려 천장을 보면서 저절로 벌어진 입으로 '으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이자 최후의 거점이 바로 그라나다가 되지만, 이곳도 반도를 거의 다시 장악한 레콩키스타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사벨라 여왕은 당장 그라나다를 수복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침략 대신 그 앞에 진을 치고 가두어 놓고는 회유와 협박을 반복하며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다. 아름다운 알함브라를 갖고싶기는 한데, 전쟁을 해버리면 부서질 것이 자명하니 그것이 아까웠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대 리더들이 다 여자들이었다면 지금 전쟁때문에 말도 안되게 부서져간 아름다운 것들이 훨씬 많이 남아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 하필 알함브라는 그 안에 모든 계급과 땅과 자급자족 시설이 있었으므로, 들어앉아서 버티기에 용이한 곳이었고 이사벨라는 다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으니 그것이 집시를 이용한 스파이 전술이었다.

집시/보헤미안은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처음 그들이 나타났을 때에 유럽인들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생각해서 이집션이라고 부르다가 '집시' 가 된다. 그런데 그 후 프랑스에 그들이 나타났을 때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체코 서쪽의 보헤미아에서 왔다고 생각했고 '보헤미안'이라 부르게 된다. 대략 청주댁 뭐 그런 것과 유사한 어느지방인을 가리키는 말인 것. 사실 집시는 인도 서북쪽 어딘가에서 유래했다는 연구보고가 있는데, 그들이 쓰는 언어가 인도지방 언어와 가장 유사하다는 것이다. 침략자들에 쫓겨 떠돌아다니던 그들은 이집트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여름내 유랑하다가 겨울에만 정착해서 사는 집시들과 달리 이집트는 대대로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이들의 유입이 반갑지 않았다. 열심히 농사지어 놓으면 겨울에 들어와서 마을주민 행세를 하며 같이 나눠먹자는 식이었으니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집시들에게는 있는 것을 나눠먹자는데 뭐가 그리 잘못인지 이집트인들의 깐깐함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 집시 소매치기들이 가방을 열어놓고 지갑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인데, 어차피 열린 가방은 모두의 것이니 내가 내용물을 좀 나누어 쓰는게 잘못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어찌됐건 이집트에서는 이들의 정착을 받아주지 않았으므로 내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게 되고, 동유럽에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어딜 가든 이들의 정착을 반기는 나라는 없었으며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소문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소문이 소문을 낳아 집시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 까지 돌았다고 하니, 당시에도 아니 지금보다 오히려 그 때에 집시에 대한 평이 안좋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에서도 떠돌고 있었던 집시들을 이사벨라가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알함브라에 들어가서 정찰도 하고 작전도 펼쳐야 되겠는데, 기독교인과 이슬람인의 차림새부터가 너무나 표시가 났으므로 스파이활동이 불가능했던 차에 어디든 떠돌아다니는 집시를 이용하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은 간단하다. 내가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문을 들었는데, 혹은 보았는데 지금 밖에 기독교인들 세력이 장난이 아니더라. 너네도 여기서 버텨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라고 민심을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서히 내분이 일어날 수 밖에 없어지고 결국 그라나다의 왕은 이사벨라와 협의를 하게 된다. 궁을 내어줄테니 우리 이슬람 국민들은 꼭 좀 살려달라고. 이사벨라는 그 조건을 수락했고, 피와 파괴 없이 무사히 알함브라를 넘겨받게 된다.

해피앤딩이 될 뻔 했던 작전은 자신들의 왕이 기독교 여왕에게 성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라나다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대대적인 반발을 일으켰고 이사벨라는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백성들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어길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이슬람인이 죽어갔고, 그들은 그라나다의 한 산에 모두 묻히게 되는데, 그 산이 '싸크라몬테' 즉 성스러운 산이다. 이슬람인들을 위해 죽어간 그들은 성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라나다를 수복한 이사벨라는 포르투갈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를 모두 통일하게 되는데, 그라나다가 그렇게 버텼던 시간은 무려 10년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알함브라를 얻어낸 때가 1492년. 바로 그 1492년이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에게 신대륙을 선사했던 그 1492년. 800년만에 이슬람에게서 나라를 모조리 되찾은 그 해. 1492년은 그래서 스페인에게 매우 중요한 해가 된다. 국토를 모두 통일한 후 신대륙에서 가져온 것들로 무역을 시작해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다. 여기 저기에서 나라를 통일한 기념으로 돈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통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백성들에게 거하게 한턱씩 쏘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들은 더 높은 귀족으로, 평민들은 조금 더 먹고 살기 좋게 모두가 보상을 받았고, 알함브라를 손에 넣는 데 일조를 한 집시들도 나름 기대하는 바가 당연히 있었다. 이사벨라는 집시들에게 꽤나 근사한 것을 내민다. 바로 삶의 터전.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허락해 주지 않았던 정착지를 선사했던 것이다. 그 지역이 바로 싸크라몬테. 이슬람인들의 피가 바쳐진 그들에게는 성스러운, 기독교인들에게는 쓸모없고 음습한 땅이었다. 

처음 정착지를 갖게 된 집시들이었지만 그들이 다른 민족들처럼 진정 '정착'이라는 것을 했는고 하니,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여전히 봄여름가을 내내 떠돌아다니다가 겨울이 되어서야 산으로 돌아왔는데, 싸크라몬테는 험하고 추운 산이었다. 집을 짓기에도 너무나 가파랐고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 돌산을 파고들어 동굴같은 구조의 집을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시련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왕이 바뀌자 스페인은 선대왕의 약속과는 상관 없이 집시들도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려면 나라에서 나가라고 명령한다. 그런 말을 듣고 제깍제깍 '예 바꾸겠습니다'라고 할리 없는 집시들은 "너 개종할꺼냐?" "아니 그걸 왜해" "아 귀찮아 좀 있다 생각해" 이런 식으로 대응을 하다가 된서리를 맞게 되니, 나라에서 개종하지 않은 집시를 잡아다가 마녀라며 화형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널널한 집시들도 이 상황에서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동굴에 모여 회의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회의라는 것이 결론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개종은 하기 싫고, 떠날 곳도 없고, 억울하기만 하고, 죽기는 싫고, 한숨만 나오는 상황에서 그 울분을 하나 둘 표현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남도 판소리마냥 절절 끓는 목소리로 피토하듯 내뱉는 노래를 하기 시작하고, 변변한 악기가 있을리 없는 상황에서 손뼉과 발구름으로 장단을 맞추고, 몸을 잘 움직이는 사람이 그에 맞는 춤을 추기 시작하니 이것이 바로 플라멩고의 기원이다. 그라나다의 '동굴 플라멩고'의 역사는 그라나다의 역사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춤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공중으로 뜨고 싶어하는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독특하게도 플라멩고만은 이 땅에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플라멩고의 동작은 매우 강렬한 탭댄스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발랄하고 통통 튀는 탭댄스와 달리 바닥을 있는 힘껏 내리쳐 화를 내고 있는 듯 한 느낌이 강하다. 무희의 표정 또한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인데, 이는 플라멩고 무희의 기본 표정이다. 한을 표현하는 춤이기에 화려한 옷과 머리장식을 하고 있지만 표정만은 어둡게 유지하는 것이다. 

갖은 핍박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집시들은 그 때 당시 모든 교역의 중심지로 잘나간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세비야로 몰려들게 된다. 그 곳에 가면 하루 하루 일꺼리가 있었으므로 굶어죽을 일은 없었던 것이다. 허나 그 곳에는 그나마 동굴같은 집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은 강가에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밤을 보내는데, 여기서도 물론 플라멩고가 빠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라나다에서는 자기네 끼리 동굴에서 추던 살풀이였지만 세비야의 강가는 사람들에게 많이 노출이 될 수 밖에 없는 위치였으므로 그들만의 살풀이가 아니라 일종의 공연이 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이들이 추는 춤이 몹시도 신기했고 오며 가며 눈길을 줄 수 밖에 없었는데, 무엇이든 일단 좀 봤으면 몇푼이라도 주어야 문화인이라 생각했던 그들이 한푼 두푼 돈을 던져주고 갔던 것이다. 집시들은 그저 심심해서, 화가 나서 춤을 추었는데 돈이 생기니 처음에는 의아했다. 하지만 이게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세비야라는 큰 도시에서, 각종 상인들이 일을 끝내고 쉬어가는 그 곳에서 돈벌이용 플라멩고를 추기 시작한다. 노래의 내용은 좀 더 가벼워지고, 박자는 좀 더 경쾌하고 빨라지고, 기타나 캐스터네츠 등의 악기가 가미되고 빨간바탕에 땡땡이가 있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고 발구름 소리가 더 좋게 하기 위해서 단상을 만들어 공연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예쁜 언니가 짝짝짝 하면서 추는 플라멩고는 세비야의 플라멩고이고, 진정 집시들이 삘 충만하게 추는 플라멩고는 그라나다의 것이다. 물론 이것을 스페인의 젊은이들도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가 남도민요와 경기민요를 잘 모르듯이.



나는 그라나다에서 공연을 봤는데,
기대보다 훨씬 이상으로 좋은 공연이었다.
그들끼리 추임새 아니리 다 넣고 손뼉치고 발구르고 해가면서 한명 한명씩 춤을 추는데
정말이지 저건 즐기지 않고서야 할 수가 없겠다 싶을 정도로 강렬한 움직임이었다.
내가 어디가서 뭘 보면서 동영상으로 찍고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동영상을 찍으면 안된다고 해서 못찍었지만...)
왕언니인듯 한 아줌마의 춤사위는 정말이지 내용이고 뭐고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 움직임만으로도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힘이 있었다.
울컥울컥하는 그런 것 말이다.

예술은 진정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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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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