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에 나다.
19세기의 조선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문제는 서양의 제국주의였다. 그것은 이미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흠씬 당하는걸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본래 화이론이라 하여 서양을 오랑캐라 칭하고 그들을 야만으로 취급했다.
허나 이제 그들이 문명을 가진 존재 즉 '화'가 되고 우리가 야만 즉 '이'가 되려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되어있었다.
조선인들은 어떻게 자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갈등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리가 '화'이고 '이'를 배척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개화, 문명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의 국가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입장은 이렇게 두개로 나뉘었다.
서구를 문명으로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야만이 된다. 서구는 우리를 야만으로 정의함으로써 자신을 문명으로 만든다.
즉 타자를 정의함으로써 나를 정의하게 된다.
이는 남성이 여성을 정의함으로서 자신을 보장받는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저들은 문명이고, 우리는 저들이 아니니 우리가 야만이 되는 정의의 과정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은 이미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있었다. 서양이라는 존재의 등장과 함께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모든 방식에 대한 근본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고, 어떻게 자기를 재구성하고 대응할 것인가, 내적 위기 또한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의견은 문명론과 양이론으로 나뉘었고, 그 밑에서 동학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동학은 조선사회의 내적 문제 즉, 봉건적 질서와 국가체제의 모순, 부조리를 뒤흔들고자 하고, 제국주의에 맞서고자 하는 아래쪽으로부터 축적되어온 변화속에서 나온 힘이었다.
18세기 이후 생산력이 증대되고 잉여생산물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생기면서, 성장을 둘러싼 갈등요소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 욕망들이 충돌하여 아래쪽은 이미 들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는 체제 외부로 튀어나가버릴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남지방에서 동학이 급속히 퍼져 융성하게 되었는데....
이 동학이라는 것이 종교이면서도 군사집단인듯도 하고 농민운동이라고도 하고 그렇다. 종교로 시작한것은 사실이다. 도교영향을 많이 받고 이것저것 다 섞어서 만든 그런 것인데, 천도교로 발전을 하면서 독자적 특징이 많이 탈락되었다. 교조신원운동을 해가면서 종교로 인정해달라고 한것으로 보아 인정 못받았다는 소리도 되고.
군사집단? 그건 확실히 아니다. 봉기도 많이 일으키고 전투도 하고 전주성도 함락시키고 했지만, 실은 이들은 훈련된 병사와는 거리가 멀다. 몇몇 뛰어난 지휘자들 앞세우고 딱한가지 전술로 그많은 전투를 치루었다. 그냥 뛰어나가는것. 농기구 다 집어들고 달구지끌고 저~~밑에서 몇날며칠 걸려 걸어와 모여서 인간답게 살아보겠다고, 나라 빼앗기지 않겠다고 무작정 뛰고본것이다. 그마음 생각하면 참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청나라랑 같이 쿵짝쿵짝 시작하니 이거 안되겠다 싶어 재봉기를 하기로 하는데... 일본이 들어온게 6월말, 동학이 재봉기한게 10월말. 대체 4개월동안 무엇을 했길래?
농사를 지었다... 농민이 아니던가. 아무리 나라가 망히기 일보직전이라도, 농사를 지어야 먹고살것 아니던가. 농민 본업이 농사인데 쌀 심어놓은 것 제대로 안지키면 겨울에 먹고살게 없는데 어쩌겠는가. 다 키워서 수확해놓고 봉기도 봉기고 싸움도 싸움이지. 그래 뭐 농사 다 지어놓고 모였는데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혁명까지는 가보지도 못했지만, 이것이 민중의 정치적 자각을 크게 유도했다는 것만은 무시못할 것이다. 훗날 있을 의병, 독립군에 이 영향이 다 연결이 되었으니 말이다.
국사책에 있는 전봉준의 사진을 아마 중등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거의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들것같은데 들려서 상투 대충 매고 흰옷 입고 앉아 쳐다보는 저 장면. 조작된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조작된것인지 선생님이 말씀을 해주셨는데 졸았는지 기억이 잘 안나고, 조작된 사진이라고 했던것만 기억이 난다. 역사에는 정말이지 조작된 사진이 수두룩하다.
동학농민군 만세!
무엇을 하든 자신의 본분은 지키면서 하자.